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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창은 한동안 엑스선 필름을 이용해 꽃과 풀이 어우러진 정원과 숲을 표현하였다. 그의 작업이 특이하게 비쳐졌던 것은 이 엑스선 필름에 기록된 손과 발을 구성하는 뼈마디가 작품 속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기 때문이다. 고속의 전자가 장벽에 부딪칠 때 발생하는 짧은 파장의 전기기파를 이용한 엑스선촬영은 물질을 투과하는 힘이 크기 때문에 질병의 진단과 치료, 공업자재의 검사, 미술품의 감정 등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독일의 실험 물리학자 뢴트겐(Wilhelm Konrad Röntgen)이 음극선을 연구하다 1895년 이 미지의 선을 발견하였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그 실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엑스(X)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 엑스선은 오늘날 의학에서 피부나 근육조직을 투과하여 인체를 지탱하고 있는 뼈의 탈골, 파손, 봉합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무거운 물건을 들다 허리가 삐끗하거나 인체가 외부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았을 때, 심지어 치아교정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외상의 관찰은 물론 엑스선촬영을 통해 뼈의 파손여부를 진단하기 때문에 엑스선 필름이 낯설거나 신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병원의 방사선과 차트 속에 들어있어야 할 필름이 한기창의 작품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새롭게 보인다. 더욱이 필름을 잘라 재조립하였으나 내부에서 조명을 비춤으로써 척추나 갈비뼈의 일부가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작품을 보노라면 부드러운 식물이 인체처럼 단단한 물질의 골조를 지닌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이런 작품을 모아 그는 ‘뢴트겐의 정원’이란 은유적이면서 의미심장한 제목을 붙인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한기창이 엑스선 필름을 이용해 작품을 제작한 것은 10여년 전에 겪은 끔찍한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던 그는 재학 중에 기본적으로 지필묵(紙筆墨)으로 제한된 재료기법에 답답함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림 그리는 일에 바쳐야겠다는 뚜렷한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가진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을 알아보다 애니메이션, 일러스트레이션, 패션 관련 업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평생 종사할만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지도교수와 상의한 결과 유학을 권유받았다.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하더라도 유학이 그에게 새로운 출발을 위한 돌파구이자 작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가지고 유학을 준비하던 중 그는 뜻밖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눈길에서 두 대의 차량이 정면충돌하는 사고로 그는 일곱 차례의 대수술을 받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결과는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다리를 자르지는 않았으나 그는 일년 반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만 했다. 병원에서 몸에 박힌 핀을 제거하다 자신의 신체를 촬영한 엑스선필름을 발견한 그는 불현듯 저것으로 작업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죽음 직전까지 경험한 그로서는 추상적인 관념이나 고상한 논리에 바탕을 둔 작품보다 자신이 겪은 고통의 시간이 던져준 질문에 대해 한번쯤 진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던 것이다. 재활치료 후 그가 진단방사선과에 엑스선필름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을 때 병원 관계자들은 당연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왜 필름으로 작업하고 싶어 하는지 그 이유를 진지하게 밝히고 설득하여 필름을 입수한 그는 엑스선필름과 LED라이트박스를 이용한 작품들로 2003년 금호미술관에서 ‘뢴트겐의 정원’이란 제목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것은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지 10년만에 맺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십 년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 속에 인간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이 결여되고 있음을 발견하는 시간이었고, 병상에 누워 죽음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림은 삶의 한 부분이란 사실을 깨닫게 만든 시간이기도 했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니 살벌하게 보이던 필름이 상당히 회화적이란 사실까지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는 고통의 기억을 재생하는 <잊혀진 흔적 속에서>를 명제로 한 첫 개인전을 열기도 했고, 2001년의 장흥 토탈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에서는 거대한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으로 자연공간을 부유하고 있는 듯한 익명의 군상을 표현하기도 했다. <신화>란 제목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에도 그는 작품에 라이트박스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필묵(筆墨)을 주요매체로 활용했다. 그 작품들에서 그가 기억하고 있는 고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나 그것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보다 추상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화면위에서 감지 혹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절망의 아우라였다.

그러나 엑스선필름은 그의 작품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엑스선필름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겪은 신체적 고통과 상처에 대해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꽃다운 소녀시절에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인공보조물에 의지하여야 했던 프리다 칼로(Frida Khalo)가 상처 입은 자신의 신체를 그렸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통사고 직후 느꼈던 죽음의 공포가 트라우마로 남아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계기를 만난 것도 이 엑스선필름을 사용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뢴트겐의 정원’에서 그의 신체는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이 필름 속에 기록된 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의사라면 마치 지문을 해독하듯 그 뼈의 구조를 통해 환자를 식별할 수 있겠지만 이미 잘려나간 필름은 그것마저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명을 받아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뼈는 병원에서 의학적 목적으로 보는 필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그는 엑스선필름을 소재로 활용하되 그것을 잘라 환상적인 화조화나 낙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그에게 작품 속에 나타난 꽃, 식물 등의 형상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훌륭한 소재이기도 했다. 인간의 신체골격과 그 구조를 드러내는 필름의 물성은 차갑고 건조하며 더욱이 죽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꽃은 생명, 충만, 포근함, 따뜻함, 화려함과 맞닿아있으므로 그의 작품 속에는 두 세계가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장식성이 내용을 추월한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제작한 작품은 대체로 검은 배경에 창백한 검푸른 빛의 식물이 조명을 받아 부각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처연(凄然)한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이트박스로 빛을 비추지 않았다면 나전칠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정물은 서구에서 정물에 대해 ‘죽은 자연(nature morte)’이라고 말했던 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화려하게 만개한 꽃을 그린 정물화에서 그 꽃은 당장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지만 언젠가 시들고 말 것임을 암시한다. 더 나아가 이런 그림은 인생도 그러하니 청춘에 자만하지 말고 죽음이 항상 곁에 있음을 기억하라, 곧 메멘토모리(memento-mori)란 경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기창의 정물을 단지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금호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그는 삼성미술관의 아트스펙트럼에 초대되었고, 창동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창동창작스튜디오에 있을 때 엑스선필름으로 작업하고 있는 그를 보고 동료 입주작가들까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필름을 잘라 꽃과 식물을 만드는데 심취해있던 그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 스테이플을 이용해 사의적(寫意的) 산수를 그리기도 했으나 이내 필름작업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면서 흑백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발전하여 LED가 지닌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LED가 구현해낼 수 있는 화려한 원색을 동원한 작품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밀려나는 대신 혼성적인 가상의 정원이 전면으로 부상한 것도 이즈음부터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모조성과 장식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문자도를 재해석한 작품을 들 수 있다.

오랫동안 생명을 주제로 한 생태학적 관심의 표현에 주력하여 인체의 뼈를 식물의 형태로 표현하던 그가 자연스럽게 관심의 영역을 풍경으로 확대하면서 모조된 혼성의 공간은 대경산수로 바뀌었다. 이러한 전환에는 그의 신혼여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일주일동안 제주도로 여행을 갔던 그는 자연이 제공하는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었고, 제주도립미술관 개관기념전에 출품하면서 그 경험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환점에 있는 작품이 <백록담>으로서 빛의 연출을 절제하는 대신 필름을 잘게 잘라 이어붙이며 호산 분화구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을 비롯하여 산수를 표현한 작품에서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검은색 배경은 사라지고 넓은 희색 여백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가 만들어내고 있는 넓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 산과 산이 이어지며 계곡으로 폭포가 흘러내리는 풍경은 실경이면서 동시에 관념적인 산수라고 할 수 있다. 이 풍경에서 엑스선필름의 정체, 곧 인체를 드러내는 영상은 사라지고 있다. 풍경의 원근과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엑스선의 이미지를 닦아내었기 때문에 그 영상 자체는 큰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풍경을 통해 죽음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대신에 넓게 트인 공간을 통해 머리속에 그린 또 다른 낙원의 이미지가 화면 위로 부상한다. 그의 풍경에서 인간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저 무심하게 흐르는 폭포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산, 그리고 고요한 바다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회귀할 곳이 산수화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이다. 그 산수가 그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준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교통사고의 트라우마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었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뼈마디가 그대로 노출된 필름을 조립하여 만든 가상의 꽃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즐거운 공포’를 더 이상 누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그것은, 아마, 그가 풍경을 더 진전시키면서 숙고할만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태만 /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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